외세에 의한 해방이 몰고온 6.25전쟁과 교훈!!

1945년 8월 11일  2차세계대전의  주요 승전국인 소련이  만주에 주둔한 일본의 관동군을 해체하고 물밀듯이 한반도에 진군하면서 한반도가 소련의 수중에 떨어질 위기를 느낀 미국은 서둘러  38선을 긋고 전후 국내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하는 소련이 38선을 기준으로 일본의 항복접수에 동의하면서 38선은 확정됩니다.
 
1945년 8월 6일과 8일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고 일본과 한반도등 동북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무리하게 원폭을 투하하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서둘러 받아내고 1945년 9월 8일 맥아더의 무시무시한 점령군적 포고령과 함께 이땅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미군정은  38선 이남 민중들의  친일파 청산이라는 염원을 무력화하고 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를 해체하였으며, 군정 통치와  미국의 반공 입장을 대변할 친일파들을 대거 요직에 기용하므로서  친일파들이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또다시 해방정국에서 항일 독립투사를 탄압하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 반면 공산주의적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친일파를 모조리 처단한 이북의  정치세력 등장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친일과 반일이라는 극과 극의 세력이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예고하는 정세가 조성되었습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 이후 찬탁과  반탁의 혼란 이후 1946년의 대구 10.1 사건,  1948년 제주4.3 항쟁으로 이남에서의  좌,우 이념대립 충돌로 발생한 사건들의 이면에는 조선공산당에 이은 남로당 같은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외에도 미군정의 실정과  미국에 의해 부활한 악덕  친일파의 폭압과 서북청년단과 같은 하수인들의 망동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작용했으며,  1948년 8월과 9월 민족의 염원인 통일정부 수립이 무산되고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과 북의 대립은 절정을 향해 치닷고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 10.19일  제주4.3 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지창수등 좌익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지리산 일대를 근거로  시작된  구빨치산 활동은  1950년 6.25전쟁 훨씬 이전부터  이미 전면전을 향한 내전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항일 무장투쟁 세력과 친일세력, 김일성과 이승만, 그리고 한반도를 점령하거나 영향력하에 두고자 했던 미국,소련의 대립각이 첨예하게 대치하면서 충돌 직전의  남과 북은  1950년 1월 마치 북의 오판을 유인하는 듯 한 에치슨 라인에 한반도가 제외면서 전쟁의 그림자는 현실이 되어갔습니다. 
 
남한의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1949년1월 이후 남과 북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이미  874회의 교전이 있었고 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등 사실상  전쟁상황과 다름  없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이 스탈린의 동의와   전쟁 1달 직전 모택동의 지원 약속을 등에 업고  전면남침을 감행 한 것은 사실이나, 외세의 힘에 의한 해방의  결과로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의 전리품적 성격으로  38선이  그어진 그 순간 사실상  한국전쟁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올해는 6.25전쟁 휴전 6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북은 미 본토 타격이 가능한 핵미사일 능력을 무기로 세계 유일 패권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미국을 상대로 북미평화협정 공세를 강도 높게 지속하고 있으며, 사실상 핵전쟁을 포기 할 수 밖에 없는 미국은 불가역적으로 진행되는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핵동결과 핵확산을 전제로 북미 대화를 모색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다가올 북미대화, 나아가 북미평화협정에  대비하여 남과 북은 강대국의 손에 의해 얻어진 해방의 결과가 참혹한 6.25전쟁으로 이어진 역사를 교훈 삼아 자주적인 통일의 단계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