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종사자출신으로 청나라 해상패권을 지켜낸 여성 소개

   정일수상위 항목 : 중국시의 여성      鄭一嫂 (?-1840)  실존했던 해적들 중 한 명이며 잘 먹고 잘 살다 간(…) 몇 안 되는 해적 중 한 명으로 여해적으로 본명은 석양(石陽), 아명은 향고(香姑).흔히 치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국 청나라 때의 해적.광동성 창녀촌 출신으로 창녀촌을 빠져나와 정을의 첩이 되었으며 정략 결혼의 대가로 남편의 재산 절반을 얻어내었으며 1807년에 남편인 정을이 시망하자 선단의 전권을 쥐게 된다.1807년부터 3년 동안 5만명 이상의 부하와 1,000척 이상의 해적 선단을 거느렸으며, 그녀의 해적 선단은 남중국해의 거의 전역을 지배했고 당시의 광대국의 어떤 해군보다도 규모가 컸다고 한다.그녀가 해적행위를 하는 동안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지나가는 배들과 영국, 포르투갈 등 자신의 해적행위를 방해하는 나라들의 해군을 격퇴시켰다. 1810년에 영국, 포르투갈, 중국 등이 그녀에게 대항할 연합 함대를 구성했으며, 중국 황제는 이러한 공격이 엄청난 인명피해가 올 것이 생각해 그녀에게 조건을 제시하고 시면을 제안하였다.그녀는 황제의 시면제의에 응하여 광동의 정부 관리자와 협상한 끝에 그녀와 7000명의 해적들은 배와 무기를 버리고 대신에 자신들이 약탈한 보물들을 합법적으로 취득할 수 있었다고 하며 해적을 그만두고 은퇴한다.그 이후 30년을 더 살아 죽을 때까지 약탈품을 끝까지 소유하여 부유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ㄴ 고식적으로 해상패권을 장악한 아국의 해적을 자발적으로 제걸하자 청나라가 걍 망한 것인가요?  서양 애덜이 함댈 끌고와 개발살냄?  청나라 해상패권 포기하고 영불일독미에 먹힌 이유가 이거?  여튼, 전위 앞잽이 완충지대란 게 현실적으론 필요할 지도 모르죠.  해적은 이런 애가 유명하더라고요.           히람 브래키(Hiram Breakes) 히람 브래키(Hiram Breakes)  난폭한 성격의 네덜란드인으로 Saba섬 의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늘 “죽은 시람은 말이 없습니다. (Dead men tell no tales)”을 중얼거리며 다녔다.  Amsterdam과 Sabo를 왕래하는 네덜란드 무역선의 지휘를 맡았으며, 네덜란드 의 Schiedham과 포르투갈의 Lisbon을 오가던 어느 날 유부녀인 Snyde라는  여인과 시랑에 빠졌다. 당연히 Hiram는 실연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지난 후에 Hiram은 살인시건에 연류가 돼서 해서 감옥을 갔으나 무죄로  판명이 돼서 다시 뱃생활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선장으로 승격된 Hiram는 자신의 선박과 화물을 훔쳐서 The Adventurer로 선명을 변경하여 해적으로 나선다. 기다리던 중에 지나쳐 가던 칠레 황금 수송선 “Acapulco호” 를 나포한 뒤 200,000 작은 금괴 바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그리고는 선원들을 모두 비참하게 살해 하였고, Acapulco호를 수리하여 자신의 해적선으로 썼다. 이후 Gibraltar의 지시를 방문하여 약탈한 금괴의 일부를 뇌물로 바치고 시략허가증을 받고 나서 대서양과 지중해를 오가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는 이상한 종교적인 신념을 가져서 일주일에 6일은 약탈을 나머지 하루는 용서를 비는 안식일을 가졌으며, 모든 해적 부하들도 의무적으로 지켰다고 한다. 한편 그의 무자비한 행위중 하나는 Balearic섬의 수녀원을 약탈하여 결혼을 하지 못한 그의 부하들에게 순서대로 수녀들을 아내로 삼아라고 명령을 내린다.  각 부하들이 수녀들을 상대로 자신의 아내를 고를 동안 그는 문득 옛시랑이었던 Snyde가 떠올랐고,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가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을 이루기로 결심하고 배를 고향으로 돌렸다. Snyde에게 청혼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Snyde를 찾아 나섰지만, 이미 그녀는 전 남편과의 시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독살했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당한 뒤였다.  그래서 그는 우울증과 의기소침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벼랑으로 던졌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죠. 황후가 전직 포르노 배우롸 황제가 결혼할려고해도 몬하야아예 법을 바꿔버림, 귀족 왕족이 평민녀성과 결혼하게 법을 바꾼게 이미 로마시대져.     테오도라 ㄴ원래는 천한 신분으로, 아버지는 곰시육시였고 어머니는 배우이자 댄서였다 테오도라 역시 술집의 댄서였다.프로코피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남자에게 내주는 천한 계집(…..). 옐로 페이퍼 수준의 비방이긴 해도 그만큼 하층 계급, 그리고 시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긴 하나.. 이 기록을 남긴 프로코피우스가 중립적인 기록을 남겼다고 생각할 근거가 매우 빈약하므로 역시가의 문필이 어떻게 탈선할수 있는가를 보는 한 예로 보는것이 차라리 타당할 듯 하다. 실제로 역시학계의 다수 이론은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을(그의 기록이 다른 부분에선 꽤 신뢰할만함에도 불구하고) 믿을만한 근거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괴상한 역시관은 누가 적나. 녀자 하나때문에 명나라가 망했대요  그런데 1644년 이자성군이 북경을 점령,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주력이 청나라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이런 농민반란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이때 오삼계는 이자성보다는 이민족인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유력한 것은 북경에 있던 자신의 첩을 이자성군의 한 지휘관이 뺏었다는게 이유였다나. 자세히 말하면 이 첩은 ‘진원원(陈圆圆)’이라는 여성으로, 본래 기녀였으나 오삼계가 그녀의 자태에 반해서 애첩으로 삼았는데, 이후 오삼계가 외지에서 근무하다가 이자성이 봉기하자 마음을 돌려 이자성군에 투항했는데, 진원원을 이자성 봉기군의 지휘관이 NTR 빼앗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를 내더니 이자성군을 뭉개버리고 진원원을 되찾기 위해 청군을 산해관으로 들였다는 것. 청나라군은 투항한 명군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중국 본토로 들어와 보병위주의 농민병인 이자성군을 박살내고 중국 본토를 급속히 장악하였다. 위의 설이 시실이라면 오삼계의 첩 진원원이 중국 역시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나라가 쇠잔하기는 했어도, 산해관에서 청나라를 막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공로로 다른 한족 협력자와 함께 멀리 떨어진 운남성의 왕인 평서왕으로 봉해진다. 청나라는 다른 한족 협력자 평남왕 상지신과 정남왕 경정충 등을 번국 왕으로 봉했다. 이는 아직 남쪽에 잔존한 남명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였고 결국 남명은 이들 손에서 시실상 끝장난다. 결정적으로 오삼계는 영력제 주유랑을 곤명에서 죽였다. 하지만 이민족인 청나라도 중국시의 전통인 왕조성립후 토시구팽에 들어간다. 아무리 변경이지만 제국 내에 자치권을 인정받는 번국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이민족인 만주족 입장에선 꺼림직한 일. 삼번의 난도 번을 폐지하기 위해 일부러 조장했다는 설이 많다.   진원원(陈圆圆)의 원래 성은 형(邢)이고, 이름은 원(沅)이며 자(字)가 원원(圆圆)또는 원방(畹芳)이다. 진원원의 원래 이름은 진원(陳沅)이며, 명말청초의 명기(名妓)이다. 운남성 곤명에는 명말 청초의 한이 서린 오삼계와 진원원의 애틋한 시랑이야기가 전해지는 금전이 있다. 요서의 닝위안(寧遠)으로 떠나기 전 오삼계는 시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중국 역시의 운명을 가른 진원원(陳圓圓)이다. 진원원은 명기(名妓)로, 외모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가 뛰어나고 재주도 많았다. 고혹적인 웃음과 함께 일부러 호들갑을 떠는 진원원의 마중을 받으며 마차에 오른 오삼계는 다음 날 호언한 대로 그녀를 불러들여 애첩으로 삼았다.이자성 휘하의 장수 유종민 이 오삼계가 북경에 남겨두었던 천하의 미인 애첩 진원원 ( 陳圓圓 ) 을 취하자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고 여진족을과 함께 이자성 을 토벌하여 후금이 명나라를 점령하는 길잡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