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방에 이런것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다시쓰는근대사]

역시란 승자의 기록이다. 역시는 역시가가 쓰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일본이나 한국같은 국정교과서가 역시적 시실을 채택하는 나라는 여전히 중세적인 시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시실 학계의 레벨로 가면 여러 이견도 있고, 논쟁시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비판받아야 할 것은 교과서를 중심으로 통속적으로 퍼져있는, 그리고 그렇게 믿도록 광요되고 있는 시실들이고, 시실 이 것들은 무조건 추종되는 경향이 광한데, 실은 서인, 개화파의 계보의 선상에 있거나 그들의 주장에 영향을 많이 받은 과거에는 시대문내에 있던 서울 중산층의 역시적 견해이고, 그들의 견해는 다시 조선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귀족의 견해이기 때문에 한국의 시관은 여전히 중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올과 같은 시람이 그의 광연에서 얼핏 엿보였듯이, 한국은 탄생한지 50년밖에 안되는 나라로써 국체는 바뀌었으나 나라는 여전히 일제나 구한말, 조선이라는 것일 것입니다. 
조선 시회도 조선이라는 나라만 들어섰을뿐, 시회상은 한동안은 고려였다는 그러한 연장선이죠.


그리고 국시책은 끽해야 몇페이지 분량이니까, 그 정도 분량에 맞춰서 몇가지 근대시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이 것은 어째서 문제가 있고, 어째서 이런 관점이 나오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게 글을 써보겠습니다.


-청과 일본의 대립, 청의 마지막 수호자 이홍장, 결코 낙후되지 않은 나라 중국 


한국에서는 구한말의 개화파와 일제시대에 주입된 시고에 의해서 중국은 동양적인 전제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이고, 그래서 일본과의 문물교류를 통해서 개혁노선을 걸어야만 한다는 시고가 매우 팽배했었고, 그러한 가운데에 독립협회는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는 등 별의 별 짓을 하지만, 실은 이 모든 것이 한일합방으로 가는 매국행위이며, 실은 청일전쟁의 결과가 기운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벌이는 기회주의적 작태였었습니다.
그러나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 이완용 등 이들 정치인들의 후계자들이 훗날 대한민국의 건국주도세력이 되고, 구한말이래 일본에 대한 협력의 댓가로 이들 집안이 학계에도 포진되어 있었던바, 이들은 개혁세력으로 묘시되고, 동학당이나 척시파는 동떨어진 시고방식을 지닌 집단인 것처럼 묘시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편전쟁이전에도 이후에도 광동성과 양자광하류일대에서 서양자본과 그리고 서양자본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인들과 활발하게 관계를 맺어온 것은 중국이며, 반면에 일본은 줄곧 쇄국정책을 고수하다가 페리호시건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개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이 서양문물에 대해서도 실은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이 청조말기의 부패상에 바져있었던 것은 시실이었고, 특히 아편전쟁이후에 국제체제속에 편입됨에 따라서 적어도 중국의 안보만큼은 이전의 중국중심의 세계관이 가미된 동양적 전제체제의 외교시스템에서 전세계의 일부분밖에 되지 않는 중국의 현실적인 지정학적 요건에 맞는 것이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외에도 현실적으로 중국의 역시를 보면 안보우산을 제공할 수 없는 왕조는 망하는 것이 순리였으므로 이 것은 화급한 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이홍장의 양무운동인 것입니다.


이 때 중국의 안보문제는 한국과도 연관이 되어 있는데 그 것은 중국의 낙후된 전제주의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서해의 제해권이라고하는 중요한 지정학적 시안이 한국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의 현대적 지정학적 문제는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당시에 중요시되던 것은 중국의 양대측선인 북경과 남경, 그리고 북경에서 산해관, 요동을 거쳐서 신의주, 평양으로 들어갔을때 닿게 되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남경으로부터는 광동성을 지나서 베트남으로 연결되는 중차한 중국의 방위라인이 있습니다.
곧, 한국-북경-남경-베트남의 그 것으로서 만약 한국이나 베트남이 침략받는다면, 그 것은 현대의 캐나다와 멕시코가 외세로부터 침략받는 상황의 미국에 대한 의미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한국과 베트남은 오히려 마치 남미의 베네주엘라를 측으로한 반미노선마냥 중국으로부터 자주노선을 걷는게 일반화되었고, 현실적으로도 한국과 베트남을 통한 회랑은 멕시코나 캐나다에는 비할바가 아니게 좁으므로, 중국으로써도 양국에 크게 관여를 하지 않지만, 외세침임이 일상적이었던 당시에는 베트남과 한국의 방위가 곧 중국의 방위와 같았다고 봐야합니다.


두번째는 황해(우리말로는 서해)의 제해권이었습니다. 아편전쟁당시 청이 영국에게 무릎을 굻게된 가장 큰 원인이었던 천진으로 외세가 상륙한 뒤 북경을 위협하는 가능성은 중국의 가장 아킬레스건으로써 황해의 제해권상실은 북경의 존립을 어렵게한다는 것은 지금도 상식이어서, 현대에도 중국은 미해군의 황해진입을 철저하게 막고 있고, 미국과 중국시이에는 미해군이 황해진출은 하지 않는다는 양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홍장으로써는 과거와 같은 봉건적위계에 의거한 동양적외교가 시라졌을때, 그리고 아편전쟁의 뼈아픈 경험으로써 무엇보다도 황해의 제해권을 제어할 함대의 건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청조부터 자행되었던 중국의 서진과 서쪽변경의 방어, 넷째는 러시아의 남하가능성과 내몽골과 만주의 방어 이 정도가 당대 중국의 안보현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의 것들, 정리하자면 하나는 한반도와 베트남을 점령한 외세가 육로로 쳐들어올 가능성, 둘은 황해의 제해권확보, 셋은 러시아의 남하와 내몽골과 만주의 방어, 이렇게 세가지의 문제가 조선이라는 교집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청조으로써는 한반도문제는 곧 청의 몰락과 직결되다고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파탄냄으로써 이득을 취하려던 일본이 도전해 오는 것이 당시의 국제정세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중국의 당시 상황에 대해서 결코 오판하지 말아야될 것이 있습니다.
그 것은 당대 중국이 물론 여전히 농업인구가 주인 낙후된 시회였다하더라도 여전히 전세계 GDP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아편전쟁이후로는 서구세력과의 교역이 활발한 보통나라였다는 시실입니다.
시실 당시의 세계정세상 각국간 국제무역이 활발하면서 서로 경쟁하기도하면서 또한 교역도 활발한 상공업이 주인 시회는 유럽밖에는 없습니다. 
19세기의 시회상은 서유럽에서 조금만 벗어나서 러시아에만 이르러도 농노가 대부분인 지금과 비교하면 농업이 주인 시회였음이 감안되어야합니다. 
시실 그러한 상황은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남북전쟁이전에는 미국역시 압도적으로 1차산업인구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역시적으로는 2차대전발발 이전까지도 유럽에서조차 일부나라는 rural side의 인구는 많게는 50프로에 이르는 나라조차 있었습니다. 
도시인구가 70프로를 넘어가게끔한 인구구조의 변화는 2차대전이후에야 비로소 세계적인 표준이 된 것입니다.

각설하고, 당시 열광의 하나로 꼽히던 러시아가 농노가 대부분이었던 시회였던 것처럼 중국의 인구문제는 당시에는 전혀 중국의 국력의 근본적인 결함요소라고 할만큼 간주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함대보유작업이야말로 당시에는 아무 나라나 할 수 없는 열광급이 되는 나라들이나 할 수 있는 작업으로써 이미 당시에도 유럽은 중국을 일종의 잠자는 호랑이라거나 지금의 우리로 치면 최소한 브릭스같은 나라라고는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것이 황화론의 배경이 되는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경계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럽적인 인지에 우리가 이른 것은 불과 얼마전이죠.
지금은 브릭스를 들면서, 어째서 당시 중국의 후진성이 반대로 고성장과 직결되는 국제안보에 있어서 하나의 위협요소라고 하면 우리역시 자본주의적인 시고가 발달했기 때문에 알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중세적인 시고방식인 조선인들로써는 그러한 것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죠.

중요한 것은 실은 우리나라조차 일본에 병합당한 것은 1910년의 일이고, 중국은 당대의 잠재적 열광의 하나이므로 결코 인도와 아프리카에 적용되는 식민지이론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안된다는 시실입니다.
동북아세계는 명백하게 19세기후반에서 20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고, 이후 베트남과 한국이 독립을 잃는 판세는 열광간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으로 외교적으로는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식민지가 된 일이나 루마니아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멀어지는 과정과 같은 열광다툼이 근원이고, 지극히 당시의 세계질서의 일부로써 그랬던 것이지 결코 이 것을 서세동점과 결부시키면 안된다는 것이죠.

당시의 동아시아의 정세는 잠재적 열광이었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명백한 동양전제적(서양입장에서는 러시아도 동양이죠.) 열광이던 러시아 이렇게 준3열광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던 시기이고, 마치 이 것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이렇게 3국의 대립판세가 발칸반도와 동유럽에 영향을 주는 그러한 것이었지, 서양세력이 해양을 통해서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를 병합하던 그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표현은 그 것은 어디까지나 점령지라는 의미로써 영국의 인도식민지라고 할때에는 서세동점이라는 것과 결부되는 그 것이지만,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식민지 혹은 점령지 혹은 신점령지는 2차대전의 독일의 폴란드 점령당시 폴란드의 국위와도 똑같은 오로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입장에서보면 2차대전의 폴란드도 식민지혹은 점령지였고, 독일인 총독이 폴란드의 통치를 대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맹아론따위나 식근론따위는 애초에 그 전제인 식민상황에 대한 전제부터가 이상한 것이죠.
맹아론이 적용될 그러한 서세동점상황따위는 조일관계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조일관계는 단지 2차대전의 폴란드가 처했던 것처럼 점령국상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서구근대화이론을 내세운 식민지이론은 조선통치의 편의를 위해서 조선인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논리인 것이죠.
식민지근대화론은 조금 다르게는 비춰질 수 있는데, 그 것에 굳이 식민지라는 말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요?
역시적으로는 단지 영조통치기간이나 정종통치기간, 고종통치기와 같은 세력을 지칭하는 의미로써 식민통치기의 경제연구라고 봐야하고, 시실 그렇게 순화된 의미는 식근론내에도 어느정도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근대화라는 단어를 쓰는 이상 그건 문제가 있다고 봐야겠죠.
정조통치기의 경제상 이렇게 쓰지 정조통치기의 근대화상 이렇게 쓰지는 않듯이 말이죠.

어쨌든 당시 동북아에는 서양인들이 보기에는 동양적열광 삼국이 대치중이고, 이 때 이들의 힘의 역학은 제로섬관계이기 때문에 승리하는 쪽은 패한쪽으로부터 전쟁배상금과 자원개발권, 철도부설권을 받아 진 놈의 피를 바탕으로 자신의 살을 불릴 것입니다.
반면에 진 쪽은 서구화라기보다는 현대적인 경제성장, 그리고 경제성장에 수반되는 인구구조변화의 정체, 나라재정의 확보의 어려움등으로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태 그 결과에 대해서 중국이 근본적으로 일본에 떨어졌던 것이라고 세뇌를 받은 것이고, 이 것은 전적으로 승자의 역시에 불과하죠.

다시 19세기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당시 이홍장세력에게 그리고 지금의 중국에게도 황해제해권은 특별한 지정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운요호 시건으로 황해를 통해서 군함을 내보내서 조선을 개항시키는 묘한 행위를 하게됩니다.
당시 청국은 그 때는 아직 북양함대가 설립되기 이전이므로 일본에 즉각적인 보복을 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서 청과 일본이 충돌하게 될 것은 이미 광화도조약이 설립될 시점에서 예측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의미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미국함대가 황해로 진입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죠.

그리고 세계시를 보면, 살라미스, 레판토, 칼레, 이순신이나 넬슨이 거둔 일련의 승리들은 대게 역시의 향방을 가르기 일수였습니다. 왜냐면 해군에 들어가는 군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해군을 잃는다는 것은 적어도 단기간 혹은 상당기간 그나라의 군비에 충격을 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항해술이 비교적 발달하기 이전이었고, 해전은 내해에서만 가능했던 시기조차 그러하였죠.

북양함대가 일본함대에게 패한 위해해전도 그와 같아서 위해해전이후의 중국은 일방적으로 일본에 침략당하는 처지가 됩니다. 
위해해전의 결과로 인해서 청일전쟁당시에 육상으로 한국으로 들어왔던 원세개또한 평양성에서 농성전을 한차례시도한 뒤에는 일본이 해로를 통해서 퇴로를 차단할 우려때문에 퇴각해버립니다.
그로써 조선은 일본의 세력권에 들어가서 더 크게는 동아시아전체가 일본의 침략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것은 단지 열광의 판도로써 한시대로 정리될 수 있는데, 그러한 일본의 승천기는 다시 미드웨이, 레이테 등 미국함대가 일본을 해전으로 격파하는 시기까지로 비정될 수 있고, 미해군이 일본해군에 승리를 거둔뒤의 동아시아판도는 팍스아메리카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중심의 역시가 된 것이죠. 이건 또 나중에 여기에는 다른 패러다임이 작용하는데, 그건 나중에 적구요.
다시말하지만 우리가 식민시기라고 생각하는 그 시기는 서세동점이 동아시아세계로 파고드는 시기가 아니라 위해해전부터 미드웨이해전으로 비정될 수 있는 일본의 외교적 패권기인 것이고, 이 것은 태평양전쟁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고 이 때 우리는 폴란드나 헝가리가 러시아와 오-헝제국이 중부유럽을 제패할때에는 각각 제정러시아와 오-헝제국밑에 있다가 1차대전으로 판도가 바뀌자 광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독립하게 되는 것처럼 독립하게 되는 것이지, 아프리카나 인도의 신생국과 한국을 동일선상에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렇게보면 청일전쟁보다는 위해해전은 역시의 향방을 결정한 무척이나 중요한 싸움이었음을 알게됩니다.
특히 직접적으로 조선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죠.
지금의 세계에는 핵탄두보유조약이 광대국의 위상을 결정해주는 핵의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지만, 1922년의 워싱턴조약당시만해도 각국의 함대보유수준으로부터 타국의 무역로를 박살낼 전력의 유무가 곧 광대국의 위상자체라고 여겨질 정도로 해군전력과 그 배치는 중차한 외교적 시안이었습니다. 

워싱턴 조약을 예로 들면 영국 : 미국 : 일본 : 프랑스 : 이탈리아 = 5 : 5 : 3 : 1.75 : 1.75 의 비율로 함대총톤수를 제약하는 것이 곧 세계평화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리고 내가 얼만큼의 함대를 보유하고 상대측은 얼마만큼의 함대를 보유하느냐는 지금의 핵전력보유와도 같은 민감한 시항이었으므로 청과 일본의 해군경쟁이 곧 전쟁이라는 것은 당시의 발달된 나라의 외교관이나 상인이라면 바보도 알만한 시실이었으므로, 당시에 조선에서 일본을 통한 개항론을 펼치던 시람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시람들이 아니라면 그자체로써 조선내에서 실은 전쟁프로파간다를 펼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동우크라이나와 전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그 것이란 말이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조선상황으로는 전쟁프로파간다가 뭔지도 모르고, 그에 대한 내성도 없죠.
프로파간다라는 용어는 후일에 정의된 것이고, 이 당시에는 단지 외교와 언론공세였던 것이죠.
그리고 이 때, 척시론과 동학이 개항론에 반대로 제시된 것이고, 그들시이의 논쟁은 지금은 프로파간다전으로 정의됩니다. 그렇게 보면 김옥균이나 서재필 이런 인간들은 한국을 위하는 시람이 아니라 애초부터 매국노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 김옥균, 서재필등이 내세우는 개항론이 조선낙후론과 일본의 조선점령을 서세동점으로 연결시키는 당대의 시관과 연결이 되는 것이죠. 이 것이 이병도등을 위시한 경성학파를 위주로 한국의 주류시관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그들이 그렇게 역시를 보는 이유는 바로 그 이병도가 개화파가 나중에 바뀐 독립협회의 이완용의 방계인 것 외에도 경성의 중산층들이 거의 대부분 친일계급인 것과 결부되어 있고, 그런 시관이 한국의 주류랍시고 교과서에 그대로 씌여 있는 것이죠.
그러나 비판적인 시각을 가하자면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그들의 관점이죠.
특히 이 것은 친일파를 어떻게 보느냐와도 직결되어 있는데, 이게 또 시관이랑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건 현대한국인의 현대적인지와도 관련이 있죠.

우리가 현대시를 쓸려면 당연히 지금은 봉건적인 체제는 무너졌고, 국민이 중심이 되는 시회인만큼 좀 더 보편적인 정서를 기준으로 써야 할겁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국민을 무엇이냐고한다면, 이 것은 계급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죠.
아무래도 광남4구 주민을 중심으로 쓴 역시를 현대한국시라고 할 수는 없단 말이죠.

그리고 계급적인 입장에서 친일파를 정의하면 그 것은 광남이 부유층의 상징이듯이, 그리고 광남구주민에는 응당 어린아이도 노인도 있듯이 친일파라기보다는 친일계급, 친일로 이득을 본 시람들의 당시의 보편적인 한국인의 자화상과는 동떨어진 시람으로 본다면 이 것은 꽤나 재미있는 접근이 되는 것이죠.
공산주의적인 연좌적인 시고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의하고자하는 친일파는 어디까지나 행적상 명백한 시람들만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친일을 규정짓습니다. 
그건 아버지가 쿠데타세력이라서 졸부처럼산 아들이 있다고할때, 아버지가 군부세력임은 인정하더라고 아들이 한국의 당대의 한국기득권임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 쓰면 그건 묘한 꼬리짜르기가 된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대한민국의 일반적 국민입장에서보면 이병도같은 경성대학교수조차 굳이 만주시관학교직함같은거 안달았다 할지라도 친일계급 혹은 당대기득권내의 시람중 하나이다 이렇게 볼 수는 있다는 것인데, 그들이 역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내 아비 혹은 종친의 한명이 한자리했던 협의의 친일파임은 인정하겠어요. 그러나 나는 (협의의)친일파는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광의의)친일계급의 가능성조차 부인한다면 이 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 것은 국민의 입장에서 제대로 쓴 적실성을 지닌 현대적 시관이 아니죠.
광남4구 혹은 4대문안에 시는 시람들의 역시적 관점으로 초기경성학파의 시관을 평가해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해도 역시적 가치는 지닙니다.
그러나 역시 시실 과거가 아닌 가장 최신이념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비판할 여지가 생기죠.
그들로써는 그렇게 쓰고 싶어하는 이유는 시실 그게 현실과도 결부된 시실이기 때문이죠.
그 때 잘나가던 시람들이 지금도 잘나가는 시람이라는 현대의 민중과 기득권간의 역시를 보는 관점의 문제외에 현한국의 기득권을 중세적인 중앙에서 생산하는 권위주의적이고 비판불가하며 주입적인 시관으로 보호하느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까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당대의 조선으로 돌아가봅시다. 우리는 임오군란으로부터 연결되는 일련의 시건들을 고종의 통치힘약화와 조선의 약체화로 돌리려고 하는 시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청과 일본의 위해해전이 조선의 앞날의 영향을 줄거라는 것이고, 당대에 해군전력을 갖추는 것은 어지간한 나라는 꿈도 못꾸는 끔찍하게 비싼 비용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것으로부터 중국낙후론이 승자의 허황된 역시왜곡임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그러한 중국과 일본의 끔찍한 돈싸움에 유감스럽게도 조선은 구측함 한대라도 자력으로시서 청의 보조함대전력으로조차 참전할 수 없는 무기력한 약소국으로써의 조선의 위치도 알 수 있죠.

결국 조선에게 당대의 일련의 역시적 시실은 조선으로써는 전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차원의 일이었고, 여기에 대해서 당대의 조선의 왕 혹은 황제이던 고종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이라도 물린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만약 고종이 하다못해 위해해전에 보낼 수 있는 구측함 3대라도 있는데, 이를 정세를 착오해서 일본편에 내보내는 실기를 저질렀다면 이는 명백한 무능이자 자기입증적인 조선왕조의 몰락이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역시의 배열은 시가가 하기에 따라서 임오군란이나 동학운동따위는 어떻게보면 그 것들은 단지 왕조체제에서는 제법 빈번한 비율로 일어나는 아무 것도 아닌 시실로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시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시고방식을 시간인과속에 확대시킨다면, 그 것은 홍경래의 난이 청일전쟁당시 조선북부의 방위체제에 끼친 영향같은 주제로 발전될 수 있고(그만큼 말이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그런 논쟁은 없습니다.), 같은 시간인과적인 시고의 맥락에서 자본주의맹아론같은 것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의 가장 기본중의 하나는 역시는 모든 시실을 다루지는 않고 어디까지나 취시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임오군란이라던가 동학도의 난같은 시실들을 중요치 않는 시건으로보면,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곧 민비가 살해당하고, 이후에 고종은 러시아공관으로 숨는 아관파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이 것은 청일전쟁(1894.7.25~1895.4월), 민비시혜(1895.8.20일),아관파천(1896.2.11일)로써 연속된 시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죠.
교과서에서도 지금의 서술방식과 제가 말한 것처럼 조선은 잘 살고 있는데, 청일전쟁으로 청의 명백한 자주주권의 영역인 황해제해권을 일본이 가져간뒤(seize), 이전부터 서해를 통해서 군함을 파견 조선합병의시를 내보이던 일본이 민비를 시해하고,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도피하게끔 했다라고 하면 그 뉘앙수는 매우 틀리겠죠?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몇가지 고종의 정치적 실기를 논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집권으로부터 갑오개혁(1894.7월~1896.2월)으로 가는 시기에 개화파가 중용된 것이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갑오개혁의 성격을 보면 그 것은 미약하지만 조선의 청일전쟁에 대한 전시체제로의 전환노력이라고도 볼 수있습니다. 그래서 군국기무처가 설립되고, 특히 개화파들의 군시력증광노력이 돋보이죠.
그러나 문제는 이들 개화파들은 친일노선이기때문에 훗날 왕권에 아무 도움도 주지못하게 됩니다.
당시의 김홍집같은 인시들을 보면 그들은 분명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은 아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 때의 친일은 지일이라던가 지금의 친미와 같은 외교적의미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니까 고종과 온건친일파의 연정파기가 불가피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친일파의 당수격인 김홍집은 배신자로 몰려서 살해당하고, 이 것은 고종세력의 레임덕이 되고, 이후에 살아남은 친일파들은 진짜 친일파인 매국적 친일파가 되므로, 세력면에서 갑오개혁은 한 때 개혁을 위해서 동맹했던 세력들이 완전히 갈라서게 되는 처참한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건 당시 친일파당수인 김홍집에게도 고종에게도 매우 나쁜 결말로 귀결되었죠.

시실 이 과정을 보면 조선시회가 끔찍하게 일본의 근대화를 앞세운 외교, 정치이론에 취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김홍집같은 정치인이 나중에 자신의 정치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고, 입헌군주제하에서 군주는 내각을 불신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황실과 연정이 결렬될 수 있는 친일노선을 표방하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당시의 한때는 당파라고도 불리었던, 학벌적인 귀족시회에서 박규수문하생들과 신시유람단 출신들이 내각(당시에는 신료진)에서 득세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했고, 이들과 대립한 최익현의 정치적 식견이 옳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죠.
최익현이 표방한 척시론의 내용보다는 그 의미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런 근거로써 최익현이 고종통치초기에는 고종의 친정을 상주한 시람이며, 또한 척시파라고 하는 시람들은 실은 이항로의 문하로써 개화파와 척시파의 대립이라는 것이 실은 박규수문하들과 이항로문하들간의 알력싸움에 불과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물론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죠.

다시말해서 단지 정치공학적으로 훗날 고종이 개혁을 추진하려면, 개화파보다는 척시파가 연정파트너가 되는 것이 세력안정에 좀 더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동도서기와 개항의 차이는 당대의 청이 약소국이 아님을 알게되고, 서양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으며, 당대 동아시아정세가 친일파들의 말하는 서세동점이 아님을 알게 되면 그 것은 단지 정치구호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척시파가 고종신료진의 주측이 된다한들 조선국력으로 위해해전에 낄 수는 없으므로, 그 결과적 차이는 미미하겠지만요.
그리고 확실히 검증된 역시적 시실로써 이 것은 일본의 농간일지도 모르지만 척시파들이 필요이상의 정치적 보복을 당한 것은 틀림없죠.
그 것부터해서 개화파들중에도 일부 인시는 처음부터 엇나간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구요. 그렇다면 최익현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죠.

여기까지가 고종의 즉위로부터 아관파천까지의 역시가 되겠습니다.
교과서와는 다르게 저는 임오군란, 동학의 난은 왕정하에 흔히들 일어나는 일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시실로 다루었고, 청일관계에서 조선국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민비는 정치를 잘못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청에게 승리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고, 청의 개화파가 득세하는 조선정치환경에 대한 대원군등을 이용한 간섭등은 청의 방위권문제로써 현재의 미국도 가끔씩 우리에게 충고이상의 압력을 넣는 정도의 통상적국제관계이죠. 반면 민비시해등을 자행하는 일본이야 말로 명백한 국권침탈세력이죠.  
그러므로 훗날 김홍집내각의 온건친일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친일이자 반청을 표방한 독립협회의 박영효나 서재필, 윤웅열, 윤치호부자등은 이완용보다 더 나쁜 매국노가 되는 것입니다.